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자락에서 훨훨 일어난 거대한 산괴이다. 서쪽으로는 전남 구례군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시에 접하며, 동북쪽으로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 동남쪽으로는 경남 하동군에 접하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의 단일 산악지대이다.지리산은 거대하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횡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 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 반야봉 낙조, 세석의 철쭉, 벽소령 달밤, 피아골 단풍, 노고단 운해, 연하봉 설경, 불일폭포, 칠선계곡, 섬진강의 맑은 물로 대표되는 지리산10경을 들먹이지 않고도, 한때 지리산에 350여 군데나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산으로 충분하다. 지리산은 아무 수식이 필요 없는 산이다.
국가적인 대제사가 거행되던 노고단 -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리산은 신라때부터 남악(南岳)으로 불리며 매년 봄,가을이면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장소였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바로 노고단이며 노고단(老姑壇)의 이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적 제사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일제시대에 중지되었다가 현재까지도 남악사 약수제 등으로 남아있다.
삼한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마한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34년(서기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을 토벌한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 탈해왕 5년(서기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항복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3세기 후반 마한세력이 중국과 교류했다고 나오고, 4세기에는 마한의 일부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로 보아 부족국가 마한은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궁마을에 쫓겨와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가 바로 이들무리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설 - 김명수의 '지리산'중에서].
반란의 산 - 지리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빨치산과 반란군일 것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한달이상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은 반란군 김지회의 근거지였다. 반란군이 물러가고 난 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이곳이 또다시 빨치산 거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노고단고원이 황폐해진 직접적인 이유이다. 이 사건으로 현재까지 노고단 산장 서측에는 흉물스런 별장촌의 잔해가 남아있고, 외국인 별장촌은 노고단 남쪽 왕시루봉 기슭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6,25 이후 빨치산 잔당들은 또다시 지리산으로 모여들었고, 이는 국군 토벌대의 무차별 포격, 방화로 이어지고 만다. 피아골 산장터에서 한트럭분 이상의 인골(빨치산의 것으로 추정)이 나왔다는 사실은 얼마나 토벌작전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에 불과하다. 1952년 빨치산 대몰살의 현장이었던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등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의 숨은 골짜기에서 인골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당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죄없는 양민이 국군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로 남아있다.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대의 무자비한 토벌과 이를 빌미로한 산악도로의 건설로 이중의 아픔을 겪어왔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 초가삼간 태운다'더니 빨치산에 한번 덴 권력자들은 지리산의 서북능선을 주능선과 뚝 떼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노고단 턱밑을 깎아 건설한 성삼재 861번 지방도로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능선마저 반으로 갈라 놓으려는 모략이 벽소령 관광도로 포장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다행히 벽소령은 포장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 서북능선은 만복대 아래서 정령치도로에 잘리워 지리산의 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노고단운해
운무가 파도처럼 몰려와 들판과 계곡을 덮고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는 변화 무쌍한 자연의 조화가 신기롭기만 하다.특히 5월에 산철쭉이 고원 전체를 분홍 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시작으로 한여름철과 가을에 걸쳐 천상의 화원을 이룬다
화엄사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는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 조사가 창건하였다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고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가 또다시 증축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 완성 하였다.
사찰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7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는 일주문을 지나 약 30°로 꺽어서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 문수(文殊), 보현(普賢)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는데 이문은 금강문과는 서쪽방향으로 벗겨놓는데 독특한 특징이다.
이 천왕문을 지나 다시 올라가면 보제루(普濟樓)에 이르고 이 보제루는 다른절에서는 그 밑을 통과하여 대웅전에 이르는 방법과는 달리 루의 옆을 돌아가게 되어 있다. 절내에는 동·서 두 개의 탑이 사선방향으로 보이며 동측탑의 윗부분 보다 한단높은 더위에 대웅전이 있고 서쪽탑의 윗부분에는 각황전이 위치하고 있다.
연곡사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있는 연곡사는 543년(백제 성왕 21년)에 화엄사종주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경내에는 동부도, 북부도를 비롯 하여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보존되어 있다.
1981년 3월 1일부터 당시 주지인 장숭부 스님이 정부지원과 시주로 옛날 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강석과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새 법당을 신축한 이후 복원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사찰 이름을 연곡사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풍수 지리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중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 치더니 제비 한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연못을 메우고 법당을 짓고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했다고 한다.
한편 연곡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의병 고광순 순절비인데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지방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담양 출신 의병장 고광순. 그는 1907년 8월 26일 지리산 연곡사에 근거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때 기습을 받아 패전하고 순절하였다, 이때 절도 불탔다. 이를 기리는 비석이 경내에 세워진 것이다.
천은사
이 사찰은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지리산일주도로 입구에 위치한 절로서 828년(신라 흥덕왕 3년) 덕운조사와 인도의 중 「스루」가 터를 닦고 절을 지어 처음에는 절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지었다 한다.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10년(조선 광해군 2년)에 혜정 선사가 다시 지었으나 숙종 2년(1676)에 불에 타고 그 이듬해 또 절을 지었으나 영조 49년(1773년)에 화재를 당해, 영조 51년(1775년)에 혜암선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일주문의 왼쪽에 부도밭이 있는데 소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못 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일주문 현판에는 '지리산 천은사'글씨가 석자씩 세로 두줄로 씌어 있는데, 그 글씨가 구불구불 흐르는 물줄기 같기도 하고 지리산 속에 부는 바람 같기도 하여 눈길을 끈다. 천은사의 본래 이름은 828년 인도 승려 스루 선사가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었다.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이있어 감로사라 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흐렸던 정신도 맑아진다 하여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에는 '남방 제일 사찰'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 하여 조선 숙종 4년(1677년)부터 천은사라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름을 바꾼 후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도 절의 수기를 지켜주는 뱀을 죽였기 때문이라며 두려워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고요한 시간에는 일주문 현판 글씨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일주문은 절의 귀중한 내력을 담고 있는 셈이다.
반야봉낙조
해발 1,732m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은 노고단에서 임걸령으로 뻗어 나가는 높은 능선으로 이어지는 동북방 5,5Km 지점 지리산권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산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반야봉에 오르는 기쁨은 낙조(落照)의 장관에서 찾는다. 한낮의 창창하던 햇빛이 그 화려했던 순간들을 뒤로하고 어둠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깊은 산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인간의 모든 번뇌와 마음, 그리고 악의 감정도 사그라들게 하며 세속에 찌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곳이다.
천은사 계곡
지리산 차일봉에서 발원하여 상선암과 천은사를 거쳐 천은제에 이르는 계곡으로 중류의 우거진 숲과 맑은물이 장관이다. 그중 경치가 좋았던 하류부분의 계곡은 천은제 축조로 수몰되고 천은사 주변은 일부 통제되고 있으나 지리산 일주도로를 타고가다 중간중간에서 계곡과 접할수 있다.
피아골계곡
연곡사에서 4km쯤 산길을 오르면 천고의 울창한 원시림 골짜기가 시작돼 반야봉, 임걸령,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골짜기가 피아골이다. 지리산중에 있는 계곡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의 하나로 꼽힌다.
이 계곡은 맑고 풍부한 계곡물과 함께 봄이면 진달래,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10월 하순의 단풍은 온산을 불태우듯 불게 물들인다. 계곡입구부터 삼홍소가지 물들인 단풍과 붉은 빛에 젖은 계곡과 삼홍소 바닥의 바위까지 붉어 장관을 이룬다.
화엄사계곡
화엄사 계곡은 일찍부터 지리산을 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길로서, 특히 노고단을 찾는 등산객과 화엄사를 찾는 관광객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곳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길이 약 8km의 계곡으로 오르는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계곡은 계류(시내)를 따라 오르므로 울창한 수림아래 시원한 물소리를 마냥 들으며 갈 수 있다. 도중에 용소며 크고 작은 폭포가 어울려 멋진 광경을 자아낸다.
광한루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광한루는 춘향전으로 많이 알려졌으며 본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으나 정인지(鄭麟趾)가 광한루라 개칭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중건하고, 정유재란 때 없어진 것을 1638년(인조 16)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연못에 면하여 남향으로 세웠으며, 툇마루 주위에 난간을 돌리고 기둥 사이에는 모두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 여름에는 개방하도록 하였다. 마루 밑의 기둥은 전면과 사우(四隅)가 4각형 돌기둥이며 나머지 3면은 원형 돌기둥의 동발기둥, 그 안쪽은 모두 나무기둥이다.
공포(栱包)는 2익공(二翼工)집에 가까운 형식으로 외목도리를 받쳤으며, 기둥 사이 미간(楣間)에는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으나 쇠서의 형태는 다포집에서 볼 수 있는 앙설형(仰舌形)이고, 후면 중앙 사이에는 조선 말기에 부설된 계단이 있다.
광한루 동쪽에는 가로 ·세로가 2칸, 1칸인 부속건물이 있는데, 주위에는 툇마루를 돌리고 난간을 세웠으며 내부는 온돌방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 얹은 주두(柱頭)로 도리를 받고 창방(昌枋)은 생략하여 기둥머리 좌우에서 첨차(檐遮)가 나와 도리 밑의 장설(長舌)을 받치게 한 간단한 구조이다. 정조 때 증축하였다.
쌍계사
고려 초기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을 건조한 혜명(慧明)이 창건하였다 한다. 경내에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쌍계사 대웅전이 있고, 그 밖에 쌍계사 중건비(重建碑)와 9기(基)의 부도(浮屠) 등이 있다.
남원 몽심재
이 가옥은 조선 말기 박동식이 처음 세웠는데 지금은 그의 7대손인 박인기씨가 살고 있다. 산을 등지고 있는 집 앞으로는 낮은 구릉이 자리하고 있다. 여러 채의 건물이 산 자락의 급한 경사면을 따라 앞뒤로 자리하고 있어 높이를달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보이며, 그 뒤편의 바깥채와 중간문을 각기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웠다. 안채에도 아래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만큼 높은 받침부를 두었다. 건물들이 높이 솟아 있음에도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멋과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준다.
남원성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조선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육천여 왜군의 포위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거의 만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채만 남았다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온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 철도개설등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실상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창건은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데서 비롯된다. 선종(禪宗)이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인데, 발전을 못하다가 도의(道義:道儀)와 함께 입당(入唐), 수학하고 귀국한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다.
도의는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들어가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 전국에 포교하였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두 대사가 나와 더욱 이 종산(宗山)을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 동안 승려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다가, 조선 제19대 숙종대에 이르러 300여 명의 수도승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숙종 26)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82년(고종 19) 사찰 건물이 소실되는 수난을 겪고, 다시 여러 승려들의 힘으로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3층석탑,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36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37호인 3층석탑 2기(基),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凝寥塔), 보물 제39호인 증각대사응료탑비,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坐像),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靑銅銀入絲香爐), 보물 제421호인 약수암목조탱화(藥水庵木彫幀畵)가 있다.
춘향테마파크
남원시 어현동 남원관광지내에 소재한 곳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 장소를 포함하여 사랑의 테마가 있는 관광지로 조성한 곳이다. <춘향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속에 담아내 과거의 사랑과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이 사랑의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조성돼 있고 만남의 장, 맹약의 장, 춘향뎐 영화세트장,출제의 장 등 사랑의 5개 마당으로 춘향테마의 일대기를 재현하고 있다. 또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완성된 동헌, 관아,내아,월매집,부용당,옥사정을 비롯해 조선 중기 서민들의 삶이 깃든 고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조선 중기 서민문화와 춘향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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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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